요즘 저는 사람 구실을 못 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지, 일전에는 낭독자로 참여하기로 했던 책담회 시간에 늦는 바람에 골목길에 급하게 주차하다 그만 사고를 냈습니다. 생돈이 나간다는 생각에 수리를 차일피일 미뤄서 아직도 뒤쪽 범퍼를 벽에 긁힌 그대로 방치하고 있고요. 또 얼마 전에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일정을 중복으로 잡아버렸단 걸 뒤늦게 깨닫고는 동료분들에게 사죄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일정이 괜찮냐는 연락에 아주 흔쾌히 괜찮다고 답장을 해놓고선 말이죠. 약속된 마감에 늦는 일도 부지기수고, 상태가 이렇다 보니 어느덧 제가 보낸 메일에는 죄송하다는 말이 으레 건네는 인사처럼 달려 있습니다. (버릇을 못 고치고 이 편지도 렛잇레터 친구들과 정해놓은 마감을 몇 시간 앞두고 쓰고 있네요….)
제 정신머리가 정말 대박이었던 건 작년 가을 모교에 초대받았던 날입니다. 졸업한 학교에서 후배들을 만나는 뜻깊은 자리인 만큼 기대하던 날이었어요. 만남 전날 고향집에 내려와 오전 열 시가 넘게 늦잠을 자는데, ‘062’로 시작하는 번호로 전화가 왔습니다. 아직 잠이 덜 깨기도 했고 이따금 광고 전화가 오는 지역 번호이기도 해서 무시하려다가,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전화를 받았더랬죠. 역시나, 강연 건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학과 조교님의 전화였고 오늘 사용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언제쯤 보내줄 수 있느냐는 게 용건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자고 있던 목소리로 오전 안에 보내드리겠다고 대답하는데, 저를 식겁하게 만든 건 그다음 돌아오는 말이었습니다. 혹시 저희 강연 열두 시 정오에 시작인 거 알고 계시죠?
열두 시라뇨, 저녁 여섯 시로 알고 있는데요…? 누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놀라 되묻는데, 제가 기억하는 시간이 금시초문인 건 그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황이 파악되고 나서 곧장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먼저 노트북을 열어 자료를 발송하고는 욕실로 뛰어 들어갔어요. 그 와중에 몰골로 갈 순 없으니 대충이라도 씻어야 한다는 생각에 물로 머리를 적시면서 동시에 이를 닦았죠.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강연에 늦는다면 후배들에게는 이게 무슨 부끄러운 일일까? 자리를 마련해준 선생님들은 나를 뭐라고 생각하려나? 저녁 여섯 시는 대체 어디서 나온 시간이지? 지난 몇 달 동안 시간을 확인하는 기본적인 일조차 깜빡하는 게 말이나 돼…?
어떻게 됐냐고요? 다행히 학교까지 거리가 차로 한 시간 남짓이라서 늦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부은 얼굴로 강의실에 도착해야 했습니다. 제 이십 대 시절의 많은 날들을 보냈던 곳에서 선생님들과 머나먼 후배분들을 만나는 자리니, 나름 말쑥한 졸업생의 이미지로 잘 보이고 싶었는데 말이죠. 지금은 익명의 구독자분들께 보내는 편지에 이런 얘기를 낱낱이도 적고 있지만, 한동안 저는 이 사건이 부끄러워 숨기고 다녔습니다. 여태껏 제아무리 지각과 착각을 반복해 왔더라도 이렇게까지 크게 어긋난 적은 없었는데, 시간을 아예 잘못 기억하고 있던 이 일이 제 사람 구실에 치명적인 하자가 생겼다는 신호처럼 여겨졌거든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요즘도 저는 시간 약속을 밥 먹듯이 어기고, 아슬아슬하게 원고를 보냈다가도 며칠 뒤에 다시 연락해 수정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사정을 헤아려주셔서 감사하다고, 너그러이 살펴봐 달라는 말을 예사로 달고 살고요. 도무지, 구실을 못 하는 거죠. 구실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핑계를 삼을 만한 재료”, 또는 동음이의로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이라고 나옵니다. 어쩜 둘 다 제 상황에 꼭 들어맞는 말들인지, 저는 자꾸 이런저런 핑계 댈 거리를 찾으며 약속을 어기고,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이라면 약속을 지키는 건 기본적인 덕목일 텐데, 시간을 맞추는 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어요.
사실 저도 답을 하나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악순환의 시작이 저의 일 욕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요. 사람은 한정된 에너지로 살 수밖에 없고 그 에너지의 총량에 맞춰 제가 일의 양과 시간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을 얼추 알고는 있어요. 해야 할 맡은 바가 차고도 넘치니 삐끗하는 순간 넘어지고 깔려서 사람 구실 못 하는 사람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겠죠. 어쩌면 저는 이 편지를 스스로를 일러바치는 마음으로 쓰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부디 제가 또 어디선가 일 중독자처럼 새로운 일들을 벌이고 있는 걸 목격한다면 뜯어말려 주시길요. 끝내야 할 일들을 끝내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는 저를 발견한다면, 이제 그만 내려놓아도 괜찮다고 타일러주시길 부탁드립니다…. |